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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의 보존법

    • WRITE 최민석 소설가

일찍이 유지태가 말했다. 우주 한 귀퉁이가 무너졌다는 듯, 믿을 수 없다는 듯.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는 내게 봄날뿐 아니라, 사랑도 가고, 세월도 가고, 추억도 간다는 것을 알려줬다. 영화를 함께 본 후배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고, 영화를 상영한 종로의 극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모둠전에 막걸리를 마셨던 피막골 주점도 사라졌다.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진다. 추억도, 사랑도, 우정도, 막걸릿집도, 피막골도…. 사라지지 않는 게 있다면, 아마 매달 꼬박꼬박 돌아오는 카드 청구서밖에 없을 것이다.
여행의 기억은 어떨까. 사라질까. 아니면, 영원불멸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사라진다(‘불멸의 이순신’도 세상은 떠난 마당이니 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여행은 부패한다. 때로는 기억이 왜곡되고, 어딘가에 ‘갔다 왔다는 사실만’ 기억난다. 심지어, ‘갔다 왔다는 기억 자체가 안 날 때도 있다’. 실제로, 어제 누군가 전주에 가면 뭘 해야 좋을지 추천을 해달라 했다. 나는 웃으며 ‘아. 저도 전주에 가보고 싶네요’ 하며 전주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해 집에 돌아와 컴퓨터 속 사진첩을 보니, ‘전주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해맑게 웃는 내 모습’이 있었다. 웃고 있는 나의 앞에는 막걸리 대 여섯 병과 안주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럼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사진까지 있는데, 나는 왜 기억을 못 하느냐고? 그게 나도 궁금하다. 그래서 나도 유지태처럼 묻고 싶다. ‘기억이 어떻게 변하니?’. 뭐 그건 내 사정이고, 굳이 변명을 해보자면, 그 사진은 내가 찍은 게 아니다. 내 손으로 카메라를 직접 꺼내지도 않았고, 구도를 잡고,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기 위해 생존에 필수적인 호흡을 멈추지도 않았다. 그냥 잠깐 웃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내가 취한 행동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내 컴퓨터에는 누가 보더라도, 내가 찍은 게 명백한 ‘전주 사진’이 수두룩했다. 전주 거리, 전주 ‘가맥집’, 전주의 ‘한상차림.’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8년 전 일이잖아. 그럴 수 있지. 점심 뭐 먹은 지도 기억 안 나는데….’ 이는 충분치 못한 변명거리였다. 그래서 진중하게 자문했다. 어쩌다 내 ‘전주 여행’은 사라져버렸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주로 가는 건 버스를 타면 그만이었고, 내가 찍은 사진들은 휴대폰을 잠시 꺼내, 버튼을 몇 번 눌렀을 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서울에 살면서 행하는 일상적인 노력과 별 다를 바 없는 행위를 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처럼 모든 여행을 기억하지 못할까. 내가 한 모든 여행의 기억은 8년 혹은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이처럼 사라지거나, 오래된 음식처럼 부패해버릴까.
12년 전에 다녀온 아프리카 여행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프리카라서 그렇냐’고? 아니다. 십수년 전에 시도했던 한라산 정상 탐방 실패도 생생히 기억한다. ‘실패해서 그렇냐’고? 아니다. 2년 전에 마침내 성공한 한라산 정상 탐방도 기억한다. ‘성공해서 그렇냐’고? 아니다. 답은 명확하다. 글을 썼다. 지금껏 내가 언급한 여행들은 모두 내가 기행문을 쓴 여행들이다. 그렇다. 여행을 다녀와서 글을 쓰면, 두 번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내 안에서 경험했던 에피소드가 새롭게 해석되고, 문장을 공들여 쓸 때 그 여행의 매력을 되살아난다. 여행할 때는 미처 몰랐던 여행의 가치를 글을 쓰는 동안 재발견하기도 한다.
대학생 시절부터 이런저런 여행을 했으니, 본격적으로 여행을 다닌 지 20년 남짓 됐다. 그러다 보니, 기행문도 이런저런 형태로 써왔다. 그런데, 확실히 여행의 기억이 상하지 않고, 오래 보존되는 것은 ‘근사한 기행문을 써낼 때’다. 짧은 문장 몇 개와 감탄사로 채워지는 게시물이 아닌, 정제된 제목과 잘 직조된 문단과 절제된 문장으로 쓰인 꽉 찬 글을 써볼 때다. 그럴 때는 여행의 감정을 생생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 박제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면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단어를 고르기 위해 사전을 펼치고, 문장의 리듬을 고치고,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며, 문장을 하나씩 쌓아갈 때, 겪은 사건과 느낀 감정의 생명이 명백히 연장되는 걸 느낀다.
그러니, 누군가 ‘어떤 여행이 가장 재미있었고, 기억에 남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내 대답은 항상 정해져 있다. 기행문을 쓴 여행이 나를 풍요롭게 한다. 사진을 찍어 내가 본 풍경과 사물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글을 써서 나의 경험과 감정을 보존하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 저자 최민석은 2010년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창비 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2012년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 <베를린일기>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