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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툰의 샘에서
    소통의 물을 긷다

    영월 ‘약사세요 약국’
    정초롱 약사

    • WRITE 박미경
    • PHOTO 남윤중
  • 익살은 일상의 영양제다. 팍팍한 하루에 소소한 해학이 깃들면, 견딜 수 없던 것들이 한결 괜찮아진다. 재미와 재치 가득한 웹툰으로 SNS 팔로워들의 사랑을 받아온 정초롱 약사는 고향 영월에 ‘만화 같은’ 약국을 열고 주민들과 유쾌히 소통 중이다. 한쪽 벽면엔 그를 닮은 캐릭터가 서 있고, 약장 곳곳엔 그가 그린 소품들이 숨어있다. 피식피식, 도란도란, 오순도순. 곱고 순한 낱말들이 이곳으로 한꺼번에 모여든다.

질문할 틈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 손님이 많아서라기보다 상담이 길어져서다. 그는 더없이 세세하게 복약지도를 한다. 평소 어떤 불편을 겪는지, 다른 약을 복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지, 빈틈없이 묻고 답을 준다. 상담은 꼼꼼하되 공간은 만만하다. 만화 캐릭터 앞을 포토 존으로 이용해도 좋고, 휴식 테이블을 약속장소로 활용해도 된다. 택배 물품을 맡겨도 대환영이다. 잔잔한 음악과 은은한 조명 사이로, 훈훈한 미소와 끈끈한 우정이 오고간다.

복약지도를 정말 꼼꼼히 하시네요?

처방조제를 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복약지도를 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시골은 병원이나 의원이 현저히 적기 때문에 약국이 대신해줘야 할 역할이 많아요. 최대한 꼼꼼하게 상담해드려서 환자분들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이어가시도록 돕고 싶어요.

약국 자리로 더없이 좋아 보여요. 이 공간과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대학 졸업 후 제천과 천안에서 2년 6개월간 근무약사로 일했어요. 거기선 병원 처방의 약들을 조제하는 게 주된 업무였거든요.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환자들과 활발히 소통하고 싶어서 약국을 직접 열기로 마음먹었죠. 천안에서 약국 자리를 알아보는데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어요. 30년간 옷가게였던 이곳에 자리가 났다고. 와보니 약국 자리로 이보다 좋은 곳이 없겠는 거예요. 하지만 고민이 됐어요. 영월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여기서 다녔거든요. 그건 곧 약국을 찾는 거의 모든 손님이 저를 아신다는 얘기잖아요. 익명성에 익숙해진 제가 ‘연고지’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어요.

막상 와보니 어떠셨어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행복했어요. 작년 4월에 약국 문을 열었는데, 벌써 이렇게 자리를 잡은 건 전적으로 영월이 고향인 덕분이에요. ‘누구네 딸내미 아니냐’며 친근하게 다가오시되, 모두들 약사로서 저를 존중해주시더라고요. ‘고향에 예쁜 약국을 차려줘서 고맙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많아요. 환영해주셔서 제가 더 고맙죠.

약국 이름도 내부공간도 익살스러워요.

약국이름 ‘약사세요’는 인스타그램에 연재 중인 웹툰 ‘yaksaseyo’에서 따온 거예요. 내부공간도 웹툰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고요. 손님들께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방법을 고민하다, 만화 속 캐릭터를 활용해 몸속 장기와 해당 약품을 벽면에 부착해봤어요. 이 자리에 약장을 놓을 수도 있었지만, 약품을 많이 비치하는 것보다 소통을 재미있게 하는 게 공간을 활용하는 더 좋은 방식이라 생각했거든요. 단발머리를 한 저 캐릭터는 저를 모델로 한 거예요. 제가 미간에 주름이 있어요. 웃을 때 이빨도 많이 보이고요. 아이들이 특히 좋아해요. 숙취해소음료 같은 것도 직접 그린 만화로 포장했더니 다들 웃으며 사가세요.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싶어요.

웹툰은 언제 어떻게 그리게 된 건가요?

제천에서 근무약사로 일할 때 취미로 만화를 시작했어요. 거기도 퇴근 후에 즐길거리가 별로 없었거든요. 대학 때부터 그림 끼적이는 걸 좋아했으니 이참에 제대로 해보자 싶었어요. 유튜브를 보면서 그림 연습을 하는데,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재미있더라고요. 인스타그램에 첫 웹툰을 올린 건 2018년 9월 천안에서 근무할 때예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몰래 올려놨는데, 약사 친구가 어느 날 저에게 ‘약사세요’라는 웹툰을 보느냐고 묻는 거예요. 내가 그린 거라고 말하니 친구가 얼마나 놀라던지…. 그 친구의 홍보로 팔로워가 늘기 시작했어요. 저만의 취미로 시작한 웹툰이 소통의 창구로 변해갔죠.

약사라는 직업을 작품으로 만날 일이 흔치 않아서일까요, 개국일지 시리즈나 약사고시 경험담 같은 게 퍽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유형별 손님 모음 편에선 괜스레 뜨끔하기도 하고….

하하하. 개인적으론 약사 가운 편이 가장 만족스러워요. 제가 다섯 개의 약사 가운을 갖고 있어요. 손님들 눈엔 다 같은 가운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길이별로 색깔별로 심지어 라인까지도 조금씩 다르거든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이야기를 만화로 꺼내놓으니 반응이 뜨겁더라고요. 그런 식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꾸준히 공유하고 싶어요.

만화 속 유머를 보면 개구쟁이 소녀였을 것 같아요. 영월에서 보낸 유년이 궁금해요.

세 자매 중 막내예요. 무언가 말해야 될 상황이 생길 때마다 언니들이 저 대신 말해주곤 했어요. 그 덕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로 성장했죠. 근데 마음속엔 장난기가 가득했었나 봐요. 내 안에 숨어있던 개구쟁이 자아가, 뒤늦게 만화로 튀어나온 것 같아요.

새로운 자아를 만났을 정도라니, 웹툰을 그린 뒤로 삶의 많은 것이 변했을 듯해요.

맞아요. 웹툰이 삶을 바라보는 저의 태도를 전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만들어줬어요. 제가 그리는 만화들은 제가 일상에서 경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다양하게 경험할수록 다양하게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들에 수시로 도전하게 돼요. 곧 운전 연수를 받을 생각이에요. 수영도 머잖아 배울 거고요. 생활 속의 작은 성장들을 웹툰으로 하나씩 기록할 거예요. 가장 좋은 건 나쁜 일을 당해도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컨대 저를 기분 나쁘게 한 누군가를 만나도 ‘이걸 만화로 그리면 되겠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어요. 여행지에서 계획이 틀어져도, 웹툰으로 표현할 생각에 그 상황이 스트레스로 이어지지 않죠. 행운이라 생각해요.

고향 약국의 젊은 약사로서 앞으로 어떤 걸 또 시도해보고 싶으신가요?

영월은 정말 아름다운 고장이에요. 많이들 놀러 오셔서 잠시나마 쉬었다 가시기를 바라요. 집으로 돌아갈 땐, 여행지의 특산물을 사 가듯 우리 약국만의 시그니처 영양제를 사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걸 만드는 게 요즘 제 꿈이에요.

그게 다가 아니다. 성큼 다가온 새봄에 그는 냉큼 인테리어를 바꿔볼 생각이다. 손님들과 더 따뜻이 소통하도록 공간을 더 산뜻이 변화시킬 작정이다. 아니 벌써 달라졌다. 익살의 바람과 공감의 햇살이, 새봄의 얼굴로 이미 이곳에 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