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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얀 사막으로 가는 길

    • WRITE 박세열 작가
  • 저자 박세열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회사에서 창을 디자인했다. 지금은 3년 반 정도의 회사생활을 마무리하고 삶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쓰며 지내고 있다. 여행 에세이집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를 썼고 2014 ASYAAF 등 코고 작은 전시에 참여했다.
  • White Sands National
  • Monument
자동차여행

운전도 제대로 해본 적 없었으면서 자동차 여행을 꿈꿨다. 언젠가 운전을 잘하게 되면 한 달 정도 미국을 돌아다니며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 먹고 손에 묻은 소스를 청바지에 아무렇게 닦아가며 여행을 하고 싶었다. 오픈카라든지 거대한 픽업트럭일 필요 없이 그저 작고 고장 나지 않을 차면 충분할 거로 생각했다.
어쩌다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공부를 하러 미국에 갔다. 그리고 작은 차를 샀고 운전면허를 딴 지 거의 10년 만에 운전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자동차 여행을 할 수 있겠다 할 정도로 운전이 익숙해졌다. 그래서 꼭 한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유학 생활의 마지막은 자동차여행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얀 사막 한복판에 홀로 섰을 때
감동이 몇 배는 더 커질 것만 같았다.’
우연히 본 사진 한 장

늘 그렇듯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은 여행의 시작이 되곤 했다.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 사진이 그랬고 인도의 판공초 호수 사진이 그랬다. 이번엔 하얀 사막이 찍힌 사진 한 장이 그 시작이 되었다. 사진을 보고 그곳을 인터넷에 찾아보니 집(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반나절 정도 차를 타고 달리면 있을 곳이라 했다. 한 점 티끌 없는 순백의 사막과 새파란 하늘의 적막한 사진이 잠시 숨을 멎게 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번 미국 생활의 마지막은 꼭 이곳 하얀 사막이어야만 한다고.
이런 생각이 슬며시 기억에서 멀어질 무렵,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 반의 유학 생활이 끝났다. 그리고 잠시 여행이라도 하고 귀국 해야겠다 생각했을 때 하얀 사막을 향한 자동차여행을 떠올렸다. 이 여행은 조금은 우울하고 괴로웠던 미국 생활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줄 대단한 계획이 될 것이라 믿었다. 나는 당장 짐을 쌌다. 조금이라도 필요할 것 같은 짐을 모두 차 뒷좌석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마트에 들러 물 한 박스, 콜라 한 박스 그리고 감자 칩 한 박스를 트렁크에 실었다. 정말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차만 몰고 나온 여행이라 마트 주차장에 잠시 차를 대고 구글 지도를 보며 며칠간의 여행 경로를 생각했다. 바로 하얀 사막으로 달린다면 아마 6시간 정도 후에 그곳에 닿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한 곳이라고 오늘 당장 그곳에 서고 싶진 않았다. 며칠은 조금 돌아가 닿을 듯 말 듯 하게 애를 태우며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하얀 사막 한복판에 홀로 섰을 때 감동이 몇 배는 더 커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며칠간 달려야 그곳에 닿을 수 있도록 커다랗고 동그란 여행 경로를 짰다. 선인장으로 시작한 황무지 도로는 어느덧 침엽수가 가득한 길이 되었고 멀리 설산이 보였다. 어떤 날은 아마존에서 본 별보다도 더 많은 별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운석이 떨어져 만들어졌다는 크레이터를 지나고 커다란 도시와 몇몇 작은 마을을 지났다. 가끔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해 질 녘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에 반해 작은 길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다. 그런 긴 운전이 끝나고 어떤 밤은 낡은 모텔에서 퀴퀴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다. 어떤 날은 꽤 괜찮은 호텔의 욕조에 뜨거운 물 한가득 받아 쌓인 운전 피로를 풀었다. 우연히 들른 도시의 미술관에서는 그림을 보다가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당황하기도 했고, 작은 카페에 앉아 바리스타들과 커피에 관해 수다를 떨기도 했다. 이렇게 며칠을 달려 어느 날, 드디어 달 밝은 밤 시간에 하얀 사막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당장 차를 몰고 하얀 사막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조금 참기로 하고 다음 날 드디어 그 새하얀 사막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를 반긴 건 사막이 아닌 커다란 ‘STOP’ 표지판이었다. 그 표지판 옆에 작은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연방 정부 예산이 소진되어 이 국립 공원 시설은 방문객과 공원자원 안전을 위해 폐쇄되었습니다.’
망연히 안내문을 읽고 저 멀리 살짝 보이는 하얀 사막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며칠간 운전이 조금 허탈했다. 그저 핸들에 기대어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너무 아쉽거나 이 여행 자체가 후회스럽진 않았다. 사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과 몇몇 국립 공원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곳에 전화 한 통화만 했더라면 정확히 운영 여부를 알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아마 닫았다는 확답을 들었다면 이번 여행은 출발조차 하지 않았겠지. 그렇게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싫어 확인을 피했을 뿐이다. 그저 자동차 여행의 이유가 필요했을 뿐 정말 하얀 사막에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얀 사막 바로 앞에서 멈춘 나의 여정이 아쉽진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쏟아지는 별빛을 보았고 사진으로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났다. 그리고 묵언 수행하듯 침묵으로 가득한 긴 운전을 통해 유학 생활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았다. 이번 여행에서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언젠가 나의 여행 일기장에 썼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렇게 여행의 감동은
늘 그곳이 아닌,
그곳에 가는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