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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19 시대의
    여행법

    • WRITE 김남희 작가
  • 다른 나를 찾고 싶다는 갈망, 더 많이 감사하고, 좀 더 겸손하고, 더 자주 웃는 자신을 보고 싶어 여행을 떠난다.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한, 길 위의 여행자로 살아가기를 꿈꾼다. 가난해도 아낌 없이 제 것을 나눠주던 길 위의 사람들처럼 그녀도 빈약할지언정 수입의 일부는 여행하는 나라의 아이들을 위해 쓰고 있다.

오이, 파프리카, 두부, 바나나, 고구마, 고등어와 유정란. 이토록 맥락 없는 조합이라니. 현관 앞에 놓인 대형 택배 상자에 든 먹거리였다. 시킨 적이 없는데 받는 사람 이름은 분명 내 이름. 보통 이런 정체불명의 상자 안에는 버려진 고양이나 강아지가 들어있던데…. 도대체 누가 보낼 걸까. 무거운 상자를 끙끙거리며 들고 올라왔다. 범인은 곧 밝혀졌다. 얼마 전에 책을 낸 출판사 대표의 카톡으로. “혹시 새벽배송 왔나요? 제가 간밤에 구호물품을 한 상자 보냈는데….” 평소에도 엉뚱하게 귀여운 분이 그날따라 귀여움이 폭발했다. “제가 요리를 안 해서 뭐가 필요한지 몰라서 막 넣었어요. 그냥 오이도 씹어 드시고 파프리카도 씹어 드시면 몸에 좋겠지 싶어서….” 확실히 다급한 심정으로 아무거나 막 끌어다 담은 구호 물품 같은 상자였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채소들을 더없이 진지하게 클릭하고 있었을 그분을 상상하니 마음이 몽실몽실해졌다.
그 전날도 경주의 게스트하우스 히어리 안주인이 보내주신 택배로 냉장고가 제법 찬 상태였다. 우리 먹는 것들 위주로, 자식들한테 보내는 것처럼 그냥 담았다고, 책으로 내가 받은 위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보내주신 먹거리였다. 보리차며 누룽지며 들기름, 김치에 가래떡 같은 식탁의 필수품들. 상자 안에는 구하기 어렵다는 마스크까지 6장 들어있었다. 마스크도 제대로 공급 못하냐며 언론이 정부를 바보 취급하던 무렵이었다. 하룻밤 손님으로 스쳐 지났을 인연을 보듬는 손길에 울컥해 택배 상자를 어루만지며 앉아있었다. 다음날 단골 카페에 원두 한 봉지를 주문했더니 두 봉지가 왔다. ‘제 마음입니다’라는 카페 대표님의 문자와 함께.
코로나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던 3월 초였다. 말레이시아와 태국 여행에서 막 돌아온 나는 2주간 자가격리를 하고 있었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피렌체를 배경으로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썼다지만 그럴 재능이 없는 나는 드라마 몰아보기나 하며 제대로 한량 노릇을 하고 있었다. 끝없이 낯선 장소를 찾아다니며 살아왔기 때문인지 자발적인 격리와 고립조차 불편했다. 무엇보다 강연이 줄줄이 취소되어 수입이 없어 냉장고 털어먹기를 하던 중이었다. 일이 없다는 건 단지 통장에 돈이 들어오지 않는 일로 끝나지 않았다.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던 끈이 끊어지고, 이 세상에서의 내 역할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더해 갇힌 집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혹은 동물)도 없어 고립감이 장마철 곰팡이처럼 번져가던 중이었다.

세계 일주를 시작했던 2003년의 봄. 나는 중국 남쪽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밤마다 기침을 하느라 잠을 못 이룬 지도 열흘이 넘었다. 기침 한 번에 폐가 1밀리씩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어느날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나를 불렀다. “오늘 나랑 어디 좀 갑시다.”
그가 끌고 간 곳은 동네 병원. 중국인 의사는 감기니 링겔이나 맞고 가라며 병상에 나를 눕혔다. 팔자에 없는 호강을 다 해본다며 두어 시간 누워있다가 처방해준 약을 받아 돌아왔다. 여행자들을 살뜰히 챙기던 주인 남자의 배려와 보살핌에 힘입어 겨우 감기를 떨쳤다. 그 집을 떠나던 날, 그가 당부했다. 잘 먹으며 다니라고, 지치면 언제든 다시 돌아와 쉬다 가라고. 배낭을 메고 걸어가다 몇 번을 뒤돌아봐도 그는 여전히 대문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 많고 사연도 많아 보이던 한국 아저씨였다. 라오스로 국경을 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날 중국 정부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의 창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음을. 내가 걸렸던 감기는 사스였을 확률이 높다. 젊고 건강했던 나는 고열과 기침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숙소의 주인이 나눠준 온기였을 것이다.
17년의 세월이 흐른 후, 몇 개의 택배 상자가 바이러스로 인한 내 고립을 깨뜨리고 있었다. 더 편하고 더 빠른 것을 찾아 달려만 가는 기술 문명이 늘 조금은 불편했는데, 택배 상자에 구원받다니.
그 종이 상자는 전염병에 맞서는 연대의 백신이었다. 떠날 수 없어서 만날 수도 없는 서로에게 보내는 애틋한 손길이었다. 뉴스에서는 온갖 나쁜 소식들만 쏟아내고 있는데, 내가 체험하는 세상의 온도는 그리 차갑지 않았다. 내 sns에는 나는 젊고 건강하니 마스크를 사지 않겠다는 다짐이, 질병본부와 의사 간호사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인사가 끝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날은 저 연결고리 없는 채소들로 뭘 만들어 먹을지 고민하며 하루를 보냈다.
자가격리가 끝난 다음날, 나도 택배를 보냈다. 지난겨울 내내 맛있게 먹었던 곱창돌김과 여행지에서 사온 기념품을 그분들께 보냈다. 받은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답례였다. 내 가벼운 택배 상자는 파주로, 경주로 날아갔다. 세상을 휩쓸고 있는 바이러스의위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마음을 싣고.

인류는 단 한 번도 고립과 단절로 위기를 극복한 적이 없다. 언제나 연대를 통해서만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다. 바이러스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공포에 작은 용기로 맞서는 사람들. 그들의 우아하고 다정한 연대가 결국 우리를 이기게 한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일상을 꾸려가고 주변을 단단하게 챙기는 사람들. 카톡으로 안부를 묻고, 택배에 마음을 실어 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곁에 있는 한 인간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경제적 위기가 와도, 외로움이 밀려들어도 내가 절망하지 않는 건 그들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멈췄지만 일상은 멈출 수 없다. 멀리 떠날 수 없는 날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여행하고 있다. 하루 종일 걸어도 피곤하지 않은 낮은 언덕 같은 사람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