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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광촌을 둘러싼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선율

    정선아라리 꿈의 오케스트라
    박종필 음악감독
    • WRITE 이지연
    • PHOTO 한정현, 정선군청
    • PLACE CAFE 496
  • 박종필 음악감독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강원도 정선으로 향한다. 김포에서 정선까지 왕복 500km를 오가야 하는 고단한 여정. 그럼에도 오케스트라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인다. 지리적, 지역적 특성상 문화예술향유 기회가 적은 폐광촌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만으로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정선의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들을 다시금 곱씹는다.

“정선까지 어떻게 가요?”, “안 피곤하세요?”, “대단하시네요.”
박종필 음악감독이 2013년 처음 플루트 강사로 정선아라리 꿈의 오케스트라(이하 정선아라리 꿈오) 수업을 위해 정선에 간다고 했을 때에도, 2017년 음악감독으로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게 되었을 때에도 지인들로부터 종종 같은 말을 들었다. 체력적으로 왜 힘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말처럼 우리 삶에는 딱 떨어지는 계산법으로 풀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손에 쥐어지지 않고 그 양을 잴 수 없으며, 눈에도 보이지 않는 ‘보람’, ‘사랑’, ‘책임’ 같은 단어가 아닐까 싶다. 오전 11시, 평소라면 수업을 위해 정선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 박종필 음악감독을 김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코로나19로 오케스트라 수업 개강이 잠정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을 얼마나 못 보신 거예요?

올해 한 번도 못 봤어요. 진학해서 오케스트라를 그만 두는 애들도 생기고, 또 신입단원 모집에 신청한 아이들도 있어서 무척 궁금한데 코로나19 때문에 상반기 수업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악기를 잡지 않아서 아이들 손이 굳었을까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키는 얼마나 컸는지 궁금해요. 그래도 얼마 전에 중학생이 된 아이들이 전화해서 “선생님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해주는데 고맙더라고요. 이런 소소한 일로 아이들에게 감동 받을 때가 많습니다.

정선아라리 꿈오는 어떤 곳인가요?

먼저 ‘꿈의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할게요. 꿈의 오케스트라는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출발해 2019년 기준 전국에 43개 거점기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음악교육을 통해 상호 학습과 협력을 이끌어내어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돕고, 지역 사회의 변화를 꾀해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것을 사업의 목표로 삼고 있죠. 교육비 전액이 무료이고, 악기도 지원해줍니다. 대신 사회적 취약계층 가정의 아동을 70% 이상 선발하고 있어요. 정선아리랑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정선아라리 꿈오도 2013년 3기 꿈의 오케스트라로 출발했는데요. 문화예술 소외지역인 폐광지역에 위치한 고한·사북·갈래·증산초등학교 학생 34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관내 초·중·고등학생 50여 명이 현악, 목관, 금관, 타악기 등 11개 파트에서 다양한 음악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지원 6년차였던 2019년 ‘자립거점기관’으로 전환하면서부터는 사업비 전액을 정선군에서 지원받고 있어요.

일주일에 두 번, 음악교육 하러 정선까지?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어요. 2013년 10월경에 아내가 갑자기 레일바이크를 타고 싶다고 정선에 가자는 거예요. 그 전까지 정선은 가본 적도 별로 없었고 제 무의식중에 ‘너무 먼 곳’이라는 생각이 박혀있어서 내심 시큰둥했죠. 그래도 이왕 간거 화암동굴 구경도 하고, 레일바이크도 타면서 신나게 놀다 왔는데 한 달 쯤 지났을까, 정선아라리 꿈오 플루트 강사 제의가 들어온 거죠. 처음엔 그 타이밍 때문에 웃음이 났다가 나중엔 거리 때문에 손사래를 쳤어요. 그런데 정선까지 와 줄 사람이 없다고 거듭 러브콜이 와서 “여행 삼아 가보자” 한 것이 7년이 됐습니다.

긴 세월 정선에 발을 끊지 않은 이유라면?

사실 거리가 가장 큰 복병이었어요. 오랫동안 앉아 운전대를 잡다보니 피로가 쌓여서 한동안 병원엘 다녔죠. 한세대학교에서 지휘법 수업을 할 때인데 오전에 개인레슨을 하고 12시에 정선으로 출발해 4시부터 수업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 새벽이에요. 운전을 8시간 가까이 하고, 수업까지 해야 하니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어요. 초반에는 그만 두어야겠다 생각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정선의 아이들이, 선생님들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고, 보면 반갑다고 달려와 주니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더라고요. 처음 애들을 만났을 때 바이올린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도 많았어요. 그런 아이들이 음표를 읽게 되고, 악기 소리를 내고, 연주까지 하게 됐을 때 가슴이 벅찼죠. 지금은 어려운 클래식 곡도 연주할 만큼 수준이 높아졌어요. 해마다 어린이날, 정선아리랑제 등 다양한 관내 행사에 참석해 일취월장 연주 실력을 뽐내고 있습니다.

폐광촌 아이들을 만나면서 음악감독님의 삶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물론이죠.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것이 아이들에게 악기를 집에 가져가 연습해도 된다고 했더니 한 남자아이가 자기는 못 가지고 간대요. 이유가 뭐냐 물었더니 가져가면 쥐가 다 갉아먹을 거라고 해서 내심 놀랐어요. 아이들의 생활환경을 일일이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이런 아이들을 위해 제게 주어진 시간만이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죠. 제가 훌륭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 아이들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아플 때도 핑계 대지 않고 무조건 정선으로 달려왔어요. 작년 이맘 때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와 연주 일정이 갑자기 변경되었을 때 말고는 7년을 개근한 셈입니다.(웃음)

오케스트라 교육이 가진 힘은 뭘까요?

지휘자석이라고 하죠. 포디움(Podium)에 오르면 아이들이 너무 잘 보여요. 아이들 성향에 따라 좋아하는 연주곡이 다 달라요. 어떤 곡을 연습할 때 몸에 흥이 나서 연주하는 애가 눈에 들어와요. 그 곡을 연습할 때는 “이 곡은 아무개가 좋아하는 곡이다”하고 아는 체를 해주면 아이가 정말 좋아해요. 제가 50대 중반이다 보니, 학부모님보다도 나이가 많아 아이들 입장에서는 어려울 수 있어요. 그래서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이름도 외우고, 애들이 먹고 있던 과자를 뺏어먹기도 하면서 장난을 쳐요. 다양한 악기가 모여 오케스트라 음악을 완성하듯이 다양한 아이들이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오케스트라는 작은 사회라 할 수 있어요. 음악적인 교감, 여기에 더해 서로에 대한 정서적인 교감과 소통을 통해 음악을 함께 완성하며 느끼는 성취, 이런 것들이 오케스트라 교육이 가진 힘이 아닐까 해요.

기억에 남는 공연을 꼽아주신다면?

2017년 꿈의 오케스트라 합동공연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가졌어요. 저희는 강원권역 꿈의 오케스트라들과 합동공연을 했는데 아이들이 서울까지 와서, 큰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 많이 설레어했죠. 이후 수업에 임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많이 진지해졌고,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다는 자신감 또한 넘쳤어요.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에게 다채로운 기회를 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뿌듯했죠.
2018년 정기연주회였던 ‘라면콘서트’도 기억에 남아요. 서민적이고 값도 싸고 들고 다니기 용이한 ‘라면’ 후원을 콘셉트로 정기연주회를 기획했고 공연을 보러 온 학부모님들, 지역 관계자 분들이 십시일반 후원해 준 라면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했어요. 무대 위가 라면 상자로 꽉 찰 정도였어요. 정선아라리 꿈오가 받은 사랑을 지역사회에 다시 돌려줄 수 있었던 뜻깊은 연주였고, 아이들도 무척 뿌듯해했습니다.

음악감독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대학에서 플루트를 전공했지만 늘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30대에 그 꿈을 이뤘고요. 예전 저희 은사님께서 “포디움은 단두대와 같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지휘자들이 무대에 올라가 실수를 하면 생명력이 짧아진다는 걸 에둘러 표현하셨죠. 그만큼 책임감이 묵직한 자리이니 음악공부를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셨어요. 제가 지휘자가 되고 보니 그 말씀이 확 와 닿더라고요. 지휘자로서 끊임없이 음악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정선아라리 꿈오 지휘자이자 음악감독으로서 우리 꿈오를 정선군립 청소년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꿈을 꿉니다. 지금 상태로는 언제까지 오케스트라가 유지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2018년 구립이 된 서울 ‘성동구립 꿈의 오케스트라’처럼 아이들이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교육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고 싶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먼 길을 오가며 열정을 다해준 선생님들과 정선아라리 꿈오를 거쳐 간 폐광촌의 수많은 아이들이 열심히 쌓아올린 7년의 역사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매년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해마다 수업이 끝날 때가 되면 아이들이 묻는다. “선생님 내년에도 와요?”, “내년에도 오케스트라 해요?” 해를 거듭하며 오케스트라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처럼 더 많은 무대에 올라 지역사회에 정선아라리 꿈오를 널리 알리고 싶다. 그 이유는 하나, 반짝이는 눈빛으로 오케스트라로 달려오는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음악교육의 장을 만들어주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