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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에서
    예술의 행복을
    긷다

    하이킹 아티스트
    김강은

    • EDITOR 박미경
    • PHOTO 아자 스튜디오
  • 아름다움, 즐거움, 여유로움. 그가 산에서 길어 오는 것들이다. 일상에선 거의 만나지지 않는 자연의 눈부심을, 직업의 틀에 갇혀 한동안 잊고 있던 ‘그리기’의 행복을, 앞만 보며 달리느라 도통 누리지 못했던 마음의 여백을, 그는 모두 거기서 얻어 온다. 높은 곳에 오르는 수고로움이 ‘괜한 것’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번번이 바뀐다. 산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로, 그의 삶엔 날마다 무지개가 뜬다.

제 나름대로 정한
한국 100대 명산을 그림으로
하나씩 그리고 있어요.
우리 땅 곳곳을 다녀보면,
‘이국적’이라 생각했던 풍경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돼요.

산이라는 이름의 ‘화실’

안에서 보아야 진짜다. 기껏해야 무릎높이일 것 같던 원추리 꽃들이, 놀랍게도 어깨 바로 밑까지 올라와 있다. 한 줌 햇살에도 한가득 빛을 내고, 한 줄기 바람에도 한바탕 춤을 춘다. 자연이 스스로 그려내는 한 폭의 수채화다. 주황빛 꽃물결 한 가운데서 그가 주섬주섬 화구들을 꺼낸다. 바깥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지금 이곳의 생생함을 하얀 도화지 위에 가만가만 옮긴다. 그림이라는 이름의 ‘기록’을 통해,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찰나에서 영원으로 이어간다.
“제 나름대로 정한 한국 100대 명산을 그림으로 하나씩 그리고 있어요. 현재 60곳 정도를 화폭에 담았고요. 하늘길이 있는 이곳 백운산도 그중 하나예요. 처음 여기 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몇 년 전에 갔던 알프스 몽블랑과 너무 비슷하더라고요. 산도, 길도, 꽃도 그곳처럼 예뻐요. 우리 땅 곳곳을 다녀보면, ‘이국적’이라 생각했던 풍경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돼요.”
꽃밭이나 숲길도, 너럭바위나 나무울타리도, 그에게는 모두 최고의 ‘화실’이다. 산에 오르다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그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춰서고 그림을 그린다. 화가 입장에선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게 오히려 ‘손해’라는 게 그의 셈법이다. 찬찬히 걷고 자세히 관찰할수록, 풍경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멈춤이, 그 느림이, 그를 행복하게 한다. 단지 산으로 화실을 옮겼을 뿐인데, 불행도 불만도 불안도 저만치 물러나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근데 막상 미술을 전공하게 되면서, 가장 좋아했던 그 일이 더는 즐겁지 않더라고요. 제대로 그려야 한다는 강박이 저 스스로를 옭아맸던 것 같아요. 산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그 일이 다시 즐거워졌어요. 정상에 빨리 오르는 걸 고집하지 않게 되면서, 완벽한 그림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내려놓게 됐거든요. 풍경은 아름답고 저는 즐거우니 그걸로 충분해요. ‘하이킹 아티스트’라는 호칭이 조금 쑥스럽지만, 제 그림을 좋아해주고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가 나요.”

수고로움이 자유로움으로 바뀌는 까닭

산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수고로움에 번거로움까지 더해지는 일이다.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든 산길을 화구까지 갖춰서 올라가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크기가 작은 도화지나 물통이 필요 없는 물붓, 미니팔레트나 드로잉키트 등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오르는 수고로움은 ‘괜한 것’ 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이내 바뀐다. 도구가 다소 부족하거나 동행이 먼저 가버려도, 풍경을 화폭에 담는 즐거움은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다. 산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 뒤로 그의 시선은 한결 깊어졌다. 자세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겨난 것이 화가로서 그는 매우 반갑다.
“같은 산이라도 계절마다 날씨마다 달라요. 색감이, 냄새가, 감촉이 매번 새로워요. 그러니 같은 산엘 다시 가도 갈 때마다 처음처럼 느껴지죠. 가장 좋은 건 제가 살던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준다는 점인 것 같아요. 힘들게 산에 오르고 나면, 그동안 해왔던 고민이 하찮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한 줄기 바람, 한 모금의 물 같은 것들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고요. 날씨를 비롯해 그날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도 산의 큰 매력이에요. 예측할 수 없으니 그때그때 일어나는 일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어요. 추억도 용기도 소망도, 그 과정에서 생기는 것 같아요.”
그가 산에서 그리는 건 수채화만이 아니다. 뜻 맞는 사람들과 ‘클린 하이킹’ 활동을 같이하면서, 산의 건강한 미래를 함께 그리고 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 계기였다. 2018년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온 그는 우리 산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리산 등반길에 올랐다. 그 길에서 참담한 풍경과 마주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간 대피소 취사장에서 술병과 쓰레기가 난무하는 풍경을 목격한 것이다. 쓰레기를 주워 내려온 후 SNS에 그날의 분노를 올렸다. 폭발적 댓글이 이어졌고, 그 성원에 힘입어 일을 벌였다. 그렇게 시작된 ‘클린 하이킹’ 활동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매월 사람들을 모집해 산의 쓰레기를 치우던 그 활동은 현재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 중이다.
자연에 흔적 남기지 않기, 서로 물건을 나누는 ‘마트 하이킹’, 책을 같이 읽는 ‘북 하이킹’, 숲 해설가와 함께하는 ‘힐링 하이킹’, 장거리 산행에 도전하는 ‘버킷 하이킹’ 등이 그것이다. 재미와 의미를 갖춘 여러 활동 덕분에 그의 삶은 갈수록 더 풍요롭다.
“클린 하이킹 활동만큼 보람을 느끼는 일이 하나 더 있어요. 2018년부터 매년 겨울마다 네팔 오지학교에서 벽화 봉사와 교육 봉사를 해요. 지인의 소개로 시작한 일인데, 히말라야 등반도 하고 재능 나눔도 하니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싶어요. 지난해엔 미얀마와 스리랑카에서 오랜 친구와 미술교육 봉사를 하고 왔어요. 드로잉키트도 나눠주고 미술의 즐거움도 알려주면서,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고 왔죠.”
그의 모습을 보며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의 뜻을, 머리 대신 가슴으로 깨달아간다.

산에서 꿈은 익어가고

그는 아마추어 산악사진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날부터 수시로 산에 올랐다. 하지만 고생스러운 산행이 싫어 곧잘 꾀병을 부리곤 했다. 그랬던 그가 스스로 산을 찾은 건 홍익대 미대 졸업을 앞두고였다. 순수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과 먹고 살 방법 사이에서 깊은 방황이 시작됐다. 막막함을 달래기 위해 매주 산에 올랐다. 지친 몸과 다친 마음이 거짓말처럼 치유돼갔다.
“2014년 ‘열정에 기름 붓기’라는 스타트업 기업에서 또래 세 명과 1년 반 동안 일했어요. 취업난과 학업경쟁으로 힘들어하는 청춘들을 위해 카드뉴스도 만들고, 그들이 모델로 삼을 만한 열정의 아이콘들을 초대해 강연회도 열었어요. 그러다 제 스스로 열정의 아이콘이 되고 싶어 그곳을 나왔어요. 이후 벽화가로 일했는데, 결국 또 방황이 시작되더라고요. 벽화 의뢰가 계속 들어올지에 대한 불안, 타인이 원하는 그림을 언제까지 그려야 할지에 대한 불만…. 그 모든 걸 산이 해결해줬어요.”
2017년 어느 날 화구를 챙겨 도봉산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기 전 너럭바위에 앉아 그림을 그려봤다. 가슴이 뛰었다. 그리는 과정도 즐겁고, 응원해주는 등산객들도 고마웠다. 응원해주는 건 등산객만이 아니었다. 그 산에서 그린 그림들을 SNS에 올리자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지지가 쏟아졌다. 그는 이제 홀로 고민하지 않는다. ‘함께’의 힘을 빌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아요. 그동안 그려온 한국의 명산들로 개인전도 해보고 싶고, 클린 하이킹 활동의 하나로 ‘전국 천하제일 쓰레기 줍기 대회’ 같은 것도 해보고 싶어요. 함께할 사람들을 모집해, 버려진 벽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를 그려보고 싶기도 해요. 도와주는 사람들이 늘 곁에 있으니, 어떤 일도 크게 두렵지 않아요.”
산에서 꿈이 익어간다. 그 꿈들이 그의 미래에 먼저 가서, 남은 삶을 별처럼 밝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