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영역

  • 느긋함 혹은
    게으름에서 비롯된

    여행의 행복

    • WRITE 청춘유리 작가
  • 청춘유리(@travel_bellauri)
    스테디셀러 <오늘은 이 바람만 느껴줘>, <당신의 계절을 걸어요> 여행 에세이의 저자인 청춘유리 작가는 좋아하는 것이 해야 하는 일이 되었으면, 해야 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결국 여행을 직업으로 택했다. 열여덟 살부터 서른이 되기까지 ‘여행’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며 글을 쓰고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In BALI
La Brisa
· 요가
서핑
· 게으름 · 여행
마지막 20대를
기념하기위한 여행

정말 오랜만에 원고를 써본다. 부끄럽지만 근 3년간 정신없이 여행만 다니느라 내 책 원고 집필 외에는 글쓰기를 소홀히 했다. 무섭게 폭우가 쏟아지는 2020년의 여름, 한국에 이렇게나 비가 자주 오는 줄은 몰랐다. 항상 여행 중으로 한국이 여름을 지날 때 나는 만년 부재중이었기에, 이렇게 한 계절을 집에서만 보내는 것도 사실상 처음이다. 작년 오늘엔 괌에 있었고 재작년의 이맘땐 아프리카에서 신혼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내년에 서른이 되면, ‘꼭 스페인 이비자에 가서 열심히 마시고 미친 듯이 흔들어야지’와 같은 목표로 신이 나 있었는데 글쎄, 서른의 나는 매일 밤 큰 텔레비전으로 이비자가 배경이 된 영화를 보면서 그곳에 닿기를 애쓰고 있다.
올해 1월, 나는 마지막 20대의 겨울을 잘 보내고자 발리로 한 달 살기를 떠났다. 나는 그곳 특유의 꿉꿉하고 더운 바람을 좋아했다.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빈땅 병맥을 따서 원샷 하면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이쯤 되면 빈땅을 마시러 발리에 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대략 7시간이라는 꽤 긴 시간을 비행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1년에 두 번 이상 발리로 떠났던 이유는 공항과 가까운 시내, 바다면 바다 숲이면 숲 지역마다 넘치는 색다른 매력들, 해 질녘을 등 뒤로하고 파도를 타는 서퍼들을 보는 재미, 타 나라에 비하면 매우 편한 쪽에 속하는 교통과 수백 개가 넘는 액티비티의 가성비는 따라올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발리로 한 달 살기를 떠나기 전 나는 여러 가지의 일들을 계획했다.
대부분의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곳에서 자유롭지만 한편으로는 알찬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보는, 사실상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멋들어진 계획을 짜느라 몹시 신이 나 있었다. 가장 먼저 이북 리더기를 샀다. 직업을 떼어놓고 봐도 산문 읽는 걸 원체 좋아해서 집에 산문집들이 꽤나 많은데 그 많은 책을 다 가져가기엔 무리였다. 종이책 넘기는 소리와 그 특유의 질감을 좋아하긴 하지만 다섯 권만 넣어도 진즉 내 가방은 수하물이 초과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요가복을 샀다. ‘본디 발리쯤 갔으면 아침 요가 수업은 들어줘야 또 멋이 아니겠는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요가복 쇼핑을 하면서도 이미 머릿속에는 발리의 아침 햇살을 맞으며 새소리와 함께 요가에 집중하는 땀 흘리는 내가 있었다. 세 번째로는 새로운 하루 기록용 작은 카메라를 준비했다. 오직 내 지나가 버린 스물아홉의 기억을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 발리에서 입을 등이 훤히 파진 원피스들 몇 벌과 글을 쓸 노트북, 넉넉한 선크림, 제일 아끼는 프리다이빙 마스크와 핀을 챙겼다. 무거운 사진 촬영용 카메라는 과감히 뺐다. 여행이 직업이기도 한 내가 촬영용 카메라를 포기했다는 건 이번 여행만큼은 찍는 것에 내 시간을 할애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캐리어 하나와 작은 백팩 하나. 모든 준비는 끝났다.

/ In BALI

비치클럽 중 이름 좀 날린다는 라브리사. 귀를 웅웅- 하고 울리는 edm 노래, 사람들의 북적이는 웃음소리, 보통 가게보다 훨씬 비싼 맥주를 들고 해가 질랑 말랑하는 짱구 비치 위에 있다. 모래가 잔뜩 묻은 빈백에 누워, 중급 이상의 서퍼들의 서핑 실력에 감탄하는 중이다. 그들도 해 질 녘 발리에서 서핑을 타는 자신들의 모습에 감탄할지 궁금했다. 발리에 온 지 벌써 2주가 다 되어간다. 과연 나는 저 멋들어진 계획들을 잘 해내고 있었을까. 정답은, 조금은 부끄럽게도 ‘아니오’다. 당시 계획된 상상 속의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아침 요가반에 들릴 것이고, 요가가 끝나면 근처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 한 잔에 책을 조금 읽다 오는 것이었다. 매일 건강식을 먹고 술은 조금 줄이겠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오늘의 나는 퀭한 눈으로 열한 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고, 어젯밤엔 분위기에 취해 와인과 보드카를 섞어 마셨다. 아침 요가는 무슨, 요가복은 아직 꺼내 입은 적도 없다. 책은 아주 간간이 손에 꼽을 정도로만 읽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중이다. 역시 계획은 이루지 않을 때 묘한 쾌감이 있다며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사실 나는 살면서 게을러 본 적이 없다. 태생이 게으르게는 살지 못하는 성격이다. 스케줄러는 항상 빡빡하게 쓰여 있어야 하고 나는 그 리스트를 체크하는 맛으로 하루를 살았다. 대학에서 수석으로 공부를 할 때도, 내가 첫 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서 1등이 아니면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1등을 해도 대단한 만족을 한 적이 없었다. 비단 내가 여행을 사랑했던 이유는 그것이 내 꿈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오직 여행을 할 때만큼은 내가 나의 새로운 모습들에 흥미를 느끼고 그 감정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게으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이 게으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하면서 게을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령 늦여름 정오가 훌쩍 넘어 일어나 새소리를 듣고 누워있거나, 온종일 창문을 열어 놓고 빗소리만 듣고 있는 내 모습은 일정이 빡빡한 여행을 했다면 누리지 못했을 행복이었다.

한 달간의 여행에서 나는 실컷 잤고, 또 원 없이 웃고 떠들었다. 사진을 많이 찍지도 않았고 그럴싸한 글을 쓰지도 못했지만 매일 저녁 해 질 녘을 바라보고 속에 담긴 이야기를 혼자 나누곤 했다. 여전히 요가복은 내 방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지만, 딱히 후회는 없다. 요즘에도 나는 그때 배운 게으름의 힘으로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코로나19로 여행과 관련된 일이 단절되었고, 반년을 집에서 혹은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국내로 여행 아닌 여행을 하며 지내고 있지만 본디 또 쉬어가야, 더 앞을 보고 달릴 수도 있지 않은가 하면서 쉬이 사는 중이다. 어서 이 시기가 끝나고 또 한 번의 게으른 여행을 하고 싶다. 언젠가, 다시 만날 그 여행을 고대하며.